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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여행

구중궁궐의 괴석에 사랑이 숨어 있다고?

by 궁미남(궁궐에 미친 남자) 2022. 10. 4.

창덕궁 낙선재 후원
낙선재 뒤뜰의 괴석들. 가까이에 보이는 괴석이 승려를 닮은 듯 합장을 하고 있다.  2022년 9월 9일 촬영.

 

괴상하게 생긴 돌, 괴석을 아시나요?

괴석(怪石)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셨나요?
글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괴석은 '괴상하게 생긴 돌' 혹은 '기이하게 생긴 돌'이라는 뜻입니다.
관상용 자연석을 뜻하는 수석(壽石)이라는 말은 익숙하게 다가오지만 괴석이라는 이름은 왠지 낯설기만 합니다.
의미는커녕 그 이름조차 낯설기에 더욱 괴상하게만 느껴지는 돌.
이렇게 특이한 이름을 한 친구가 바로 이 글의 주인공입니다.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모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궁궐을 찾은 분들이라면 궁궐 곳곳에서 기다렸다는 듯 얼굴을 내미는 울퉁불퉁 바위들을 보셨을 거예요.
이 친구들이 뭔가 특별하게 보이는 까닭은 대부분 화강석을 정교하게 깎은 장식용 받침대 위에 놓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소개할 괴석들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는 창덕궁에 있는 친구들인데요, 여러 궁궐들을 다니며 살펴본 결과 창덕궁에 가장 많은 괴석이 자리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중에도 주로 임금과 왕실가족의 생활공간이라 할 수 있는 내전 권역에서 많이 발견되는데요, 저는 특히 낙선재 후원의 괴석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원래 창경궁 권역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창덕궁에 속해 있는 낙선재는 1847년 조선의 제24대 임금인 헌종이 세운 곳으로 대한제국의 황실가족이 가장 마지막까지 생활했던 공간입니다.
왕세자의 정당(正堂)인 중희당 동편에 세워진 낙선재 권역에는 세 채의 주요 건물들이 있는데, 그 이름은 낙선재(樂善齋), 석복헌(錫福軒), 수강재(壽康齋)입니다.
'복을 하사하다'라는 의미를 품은 석복헌은 1848년에 지어졌는데, 헌종이 후궁인 경빈 김씨를 위해 지어준 것이라고 합니다.
석복헌 동편에 자리한 수강재는 이 무렵 다시 지어졌다고 하는데, '장수하고 강녕하기를 바라다'라는 이름에는 그곳의 주인인 할머니 순원왕후 김씨를 향한 헌종의 마음이 담긴 듯합니다.
이 권역의 건물들은 소박함을 추구한 헌종의 뜻에 따라 단청을 칠하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대표적인 건물인 낙선재의 이름에는 '선을 행하기를 즐기는 집'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아마도 임금과 왕실가족이 선을 행한다는 것은 올바름을 추구한다는 것과 통하는 것일 테니, 몸과 마음으로 선을 행함으로써 하늘의 복을 받아 왕실이 번영하고 백성들도 큰 복을 누리기를 바라는 뜻을 이 낙선재라는 이름에 담아 기원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소박하면서도 원대한 이상을 담은 공간이기 때문일까요?
낙선재에는 크고 작은 괴석들이 곳곳에서 도교적이면서도 불교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현대적인 가치까지 담아내고 있습니다.

 

낙선재의 앞과 뒤에 숨어있는 괴석의 아름다움

창덕궁을 대표하는 괴석들은 사실상 이 낙선재 뒤뜰에 모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직접 방문하셔서 눈으로 확인하시면 제 말의 뜻을 바로 이해하시겠지만, 일단 간단하게 설명부터 하자면 낙선재는 한옥답게 현판이 있는 앞쪽에서 창문을 열어 뒤뜰의 괴석을 드러내며 아름다움을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 낙선재 앞쪽에서 열린 창을 통해 바라보면 맹금류처럼 보이는 괴석이 자연스레 눈에 들어옵니다.
눈이 내릴 때면 일부분이 눈에 쌓여 선계(仙界)의 황홀함을 드러내기도 하지요.
괴석의 매력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뒤뜰로 나아가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치 승려가 두 손을 모으고 참선을 하는 듯한 형태의 괴석도 눈에 들어옵니다.
특이한 것은 이 괴석은 보기에 따라 마치 설악산 토왕성폭포처럼 하얀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낙선재 앞쪽에서 마루를 통해 만났던 맹금류를 닮은 괴석의 받침대에는 소영주(小瀛洲)라고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데요, 이 이름을 이곳에 쓴 것 또한 참으로 묘합니다.
괴석의 받침대에 선계를 뜻하는 영주라는 이름을 새긴 까닭은 그 위에 자리한 괴석에 그만큼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이 숨어있다는 뜻일 겁니다.
그렇다면 관람객은 이런 이름의 괴석을 보며 '아, 그런 뜻이구나.' 하고 다른 곳으로 향할 게 아니라, 괴석을 찬찬히 바라보며 그 모양이나 주변 경관과의 어우러짐을 통해 궁궐 기획자들이 바라본 선계를 느껴보면 좋겠지요.
이런 시도야말로 궁궐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만나 즐기는 좋은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이 소영주 받침대는 낙선재 뒤뜰의 가운데쯤에 위치해 있는데요, 저는 소영주 받침대 위의 괴석 또한 훌륭하지만 궁궐 기획자들은 어쩌면 이 뒤뜰 전체를 하나의 선계로 간주하고 그 명폐를 이 공간을 대표하는 괴석의 받침대에다 붙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떤가요?
낙선재 후원의 괴석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이 느껴지시나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창덕궁 낙선재를 직접 찾아 괴석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직접 보고 느껴보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 봅니다.

 

사랑 하트 봄
낙선재 뒤뜰의 하트. 사랑을 상징하는 하트 너머로 봄꽃들이 화사하게 웃는다. 2022년 4월 12일 촬영.

 

괴석에 숨어 있는 현대판 사랑의 상징, 하트

제가 소개한 괴석 이야기를 읽으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그저 돌로만 보았던 것들에 무척이나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는 걸 확인하고 놀라셨다고요?
조만간 창덕궁을 찾아 직접 보고 싶은 생각까지 하셨다고요?
그렇다면 저의 이번 시도는 성공한 셈입니다.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괴석에는 현대판 사랑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하트가 숨어있거든요.
도교적이고 불교적인 세계관을 느끼게 하면서도, 동시에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사랑의 상징까지 간직한 괴석이 참으로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이 하트 모양의 상징은 언제 가장 빛이 날까요?
제 생각에는 꽃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봄날이 하트를 품은 괴석과 가장 어울릴 듯합니다.
하트를 통해 들어오는 수많은 꽃들이 사랑하는 마음을 더 크게 증폭시킬 테니까요.
어떻게 보면 낙선재가 헌종 임금의 경빈 김씨를 향한 사랑이 깃든 공간이니 괴석 또한 그 마음과 함께 공명하며 하트 모양을 드러낸 게 아닐까 하는 상상까지 해봅니다.
이제 저의 괴석 이야기를 읽으셨으니 언젠가 창덕궁을 찾으셨을 때 낙선재 어느 공간에서 기이하게 생긴 바위를 만나신다면 조금은 익숙하게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 또한 조만간 낙선재를 찾아 가을과 함께 어우러지는 괴석들의 모습을 담으며 못다한 이야기를 나눠볼 겁니다.

 


2022년 10월 4일
낙선재 괴석들을 그리며 궁미남이 쓰다

(추신)
창덕궁2022-22 [20220909]
2022년 들어 22번째 만난 창덕궁.
2라는 숫자가 다섯 개나 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이번 글의 소재이자 주제인 괴석도, 괴석이 보여주는 사랑을 뜻하는 하트도 두 글자로 된 이름이니 2와 어울리네요.

궁궐의 아름다움 가운데 하나인 괴석에 대한 글을 쓰면서 저 또한 궁궐에 대한 이해가 좀 더 깊어졌습니다.

이렇게 늘 색다른 모습으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드러내는 궁궐이 너무도 소중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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